봄내 춘천시 시정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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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364

2021.5
#봄내를 품다
최돈선의 골목이야기⑰
88년 성걸이의 그리움이 그려낸 효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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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걸이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해, 춘천에 홍성걸이란 학생이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성걸이는 문재文才가 뛰어나 각종 학생문예대회를 휩쓸었다.

88년엔 강원대학교 백일장에 참가하여 으뜸상인 장원의 영예를 안았다.

게다가 그는 그림에도 소질을 보여 글쓰는 문예반 학생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늘 겸손하고 얌전한 학생이었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2021년 4월 초 어느 날, 효자동과 약사동 사이를 가르며 흐르는 천변 다리 아래에 그가 나타났다.

이제 오십에 가까운 나이였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 학생은 시인이 되어 있을까.

하지만 그는 춘천의 유능한 문화기획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시를 쓰고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냥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선 아직도 소년의 풋풋한 모습이 남아 있었다.

늘 겸손하고 얌전했던 그 학생이 소년과 청년을 넘어 이제 장년이 되어 갈 때,

여전히 그는 차분하고 깍듯했으며 겸손했다.

20년 넘게 병든 어머니를 수발한 홍성걸이 효자동에 무슨 까닭으로 나타난 것일까.



효자란 이름의 반희언과 지금의 홍성걸


벽화의 원작자이자 소문난 효자 성걸이


사람의 일생 중에 효자란 이름을 얻기란 참으로 어렵다.

유교는 충효가 인간의 근본임을 가르쳤고 조선사회는 이를 사회규범과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지금은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많이 퇴색되어 있지만, 효는 여전히 한국인의 정신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효! 이것은 한국인의 마음 속에 늘 지켜야 할 인간의 도리와 도덕의 품성으로서 영혼처럼 간직되어 왔다.

한 동네에 효자가 난다는 것은 그만큼 드문 일이었다.

춘천에 유일하게 효자문이 있고 효자동이란 이름을 얻게 된 효자마을.

그곳은 1950, 1960년대만 해도 판잣집이 다닥다닥한 골목길의 언덕빼기 마을이었다.

반희언은 지금의 효자동 마을에서 1554년 5월 18일 출생했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용장 반처량의 아들이었다.

희언이 아버지를 선산에 모시고 3년의 시묘侍墓를 마친 다음 어머니에게 돌아오니, 어머니의 병세가 위중해 있었다.

정성을 다해 병수발을 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어느 날 깜빡 잠이 들었을 때 산신령이 나타나 대룡산으로 가면 어느어느 곳에 시체가 있을 것이니

그 시체의 머리를 가져와 고아드려라, 하고 가르쳐 주었다.

즉시 길을 떠나 대룡산 산속으로 가니 정말 오래된 시체의 머리가 있었고, 그것을 솥에다 고았다.

솥을 열자 놀랍게도 사람의 머리는 산삼으로 변해 있었다. 어머니가 94세가 되던 해였다.

한겨울에 갑자기 딸기가 먹고 싶다는 어머니를 위해 온 산을 뒤져 눈밭에 돋아난 산딸기를 구해 온 적도 있었다.

 선조 41년 (1608)년 반희언의 효행이 입금의 귀에까지 들어가 효자문이 세워졌다.

그로부터 동네를 효자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홍성걸도 20년 넘게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실았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어머니의 똥오줌을 손수 가려주고, 매일 어머니를 따뜻한 물로 씻겨 드렸다.

그래서 사업차 멀리 출장을 갈 수도 없었다.

외지 먼 곳의 사업을 수주받을 수 없는 처지여서 사업이 더 번창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자기가 맡은 작은 일일지언정 열심히 하여 직원들의 월급은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챙겼다.

재작년 어머니가돌아가셨다. 홍성걸은 매주 어머니의 산소를 찾아가 산소를 돌보고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곤 한다.

이제는 먼곳으로 다닐 수 있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만 코로나19가 찾아왔다.

수주는 반 토막 이상이 났고, 조그만 기획사는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홍성걸은 늘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약사천 사모곡이 그려낸 낭만골목


 2021년 4월 초 어느 날 효자동 약사천엔 이색적인 전시 그림이 나붙었다.

송사리 떼가 물길을 거슬러 오르고,

텃새가 되어버린 쇠물닭이 유유히 헤엄치는 약사천 천변엔 사람들의 봄나들이가 한창이었다.

개나리가 노랗게 꽃을 틔우고 수양버들이 연두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천변 돌담에는 홍성걸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판넬 26점이 걸렸다. 

첫째 골목 뭉클코스, 둘째 골목 레트로 코스, 셋째 골목 상상 코스까지 판넬 그림들은

약사천의 맑은 흐름에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마스크 쓴 시민들은 그 긴 그림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오고 갔다.

효자동 그림벽화는 홍성걸의 그림과 글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실제 효자동 담에 그려진 그림들은 홍성걸이 맡아 그려낸 그림이 아니었다.

그 그림들은 하청받은 사람들이 홍성걸의 그림을 복사해낸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나니 아쉬운 점이 많았다.



아름다운 순례, 성걸이의 꿈


_뭉클길
 성걸이는 이 골목에서 태어나 평생 효를 행하고 간 반희언을 그리면서 뭉클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을 것이다. 반희언과그 어머니, 자신과 얼마 전에 작고한 어머니가 자꾸만 겹쳐 보였다. 그리고 반희언처럼 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다. TV 김영철의 ‘동네한바퀴’에 나온 평양막국수집, 그 집이 반희언 골목에 자리 잡고 있음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와 막국수 한 그릇 사드리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한이 된 홍성걸이었다. 물론 거동을 전혀 못 하는 어머니였기에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막국수집을 지날 때는 늘 목이 메고,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_레트로길
 지난날은 아름다웠다. 아픔도 시간이 흐르면 추억의 앨범이 되어 그리워지는 법이다. retro는 ‘뒤로’란 의미의 지난날을 의미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때 그 시절을 레트로라 부른다. 효자동엔 그런 옛 고물수집 가게가 아직도 석양의 그늘 속에 놓여 있다. 세월의 먼지가 묻은 그 물건들은 희미한 필름처럼 그때 그 시절을 소환한다. 저쪽 담뱃가게 골목에서 펑 소리가 난다. 아이들과 할머니가 귀를 막고, 강냉이튀김에 하얀 김이 골목을 뒤덮는다.

 찐빵집에선 여학생 둘과 남학생 둘이 찐빵을 먹으며 호호거린다. 쉘부르 다방의 뮤직박스 안엔 스카프를 멋지게 두른 디제이가 신청곡을 틀어놓고 있다. 분명 고등학생인데 대학생 차림으로 신청곡을 쓰고 있는 여학생둘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줄넘기를 하는 여자아이들의 노랫소리,고지서가 잔뜩 쌓여 있는초록대문 양 옆으로 극장매표구와 〈고교 얄개〉포스터가 붙은 골목집이 나온다. 영회를 돌려야 할 그 집은 인적이 괴괴하다. 몇 년째 이 집은 비어 있는 걸까.그 밖에도 골목엔, 우리가 그때 그 시절에 만날 수 있었던 풍경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우리는 그 골목에서 그리움을 만난다. 만화방, 시장의 떡볶이 아줌마, 생선장수, 붕어빵장수, 군고구마 굽는 냄새와 찹싸알~떡 장수, 말타기 놀이, 술래잡기…등.



_하늘을 나는 구름빵가족
 레트로 골목을 빠져나오면 내리막길이 있고, 경운기 뒤에 앉아 털털거리며 언덕을 내려기는 소녀와 강아지를 만난다. 이 소녀와 강아지는 꽃잎을 날리며 언제나 이 언덕길을 오르내린다. 바람이 벽을 스치며 흐른다. 하트나무 사이를 지나면


가을이 뜨락에 내려와 별을 쏟을 때

방울꽃 접시꽃이 만석이 된다


이 시를 품은 카페는 〈시인의 뜰〉이란 이름으로 늘 그곳에 있다. 청명한 하늘로 노랑 빨강 비행기가 날고 구름빵가족이 둥둥 떠 간다. 이제 봄이다. 연푸른 하늘과 연두빛으로 물드는 효자동 골목엔 ‘히늘지킴이 정크로봇이’ 정오의 나팔을 게으르게 분다. 뚜 뚜 뚜우~ 뚜우~